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

     


    나의 기억은 언제나 15살에서 시작된다. 그때의 나는 철이 들려면 한참이 남았다는 소리를 어딜 가나 듣는 학생이었다. 또래의 남자애들 보다 한참이나 작아서 매번 발에 채이기 바쁘다는 농담을 듣고 다니곤 했는데, 그게 또 사람의 기분을 조금씩 긁게 했다. 학교에서 동급생이 아닌 3 학년 선배와 싸우고 교무실에 불려갔을 때에는 이제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다는 마음이 강했다. 학교에서 잘려도 부모님은 괜찮다며 말하실 것 같았고, 동생들은 늘 그렇다는 듯 나를 볼 것이 뻔했다.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나에게 달려와, 내 이름을 빤히 부를 때에는 대게 그런 내용일 거라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를 또 찔렀나. 아 또 반성문을 얼마나 쓰게 될까. 지긋지긋한 세상살이, 확 끝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덤으로 했을 때 선생님은 내 손을 꽉 잡고 우셨다. 이재야, 너네 부모님이…….

    부모님은 바쁜 사람들이었다. 첫째의 성격이 너무나 사회에 부합하지 않는 탓에 부부 동반 모임에 단 한 번도 같이 가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도 나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먼저 가자고도 말 하신 적이 없었다. 다만 중학교 1학년 무렵, 같은 반의 누군가와 또 엄청나게 싸우고 계단까지 굴러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내 손을 잡은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셨다. 재야.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됐다고 생각하고, 길에 잘못 들어왔다고 생각이 들 때엔 오히려 길을 똑바로 가고 있는 거야. 우리 재는 똑똑한 아이니까 엄마 말 이해하지? 나는 그때 무어라 답을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계단에서 구른 여파로 당분간 다리에 깁스를 하고 걸어 다녀야 했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게 꽤 불편해서 별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진 않았다. 그러고 나니 문득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에게 좋은 아들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확신. 그건 부모님의 장례식장에 들어서서, 상주라며 교복 마이를 입고 상주 표시를 달 때까지도 버리지 못한 생각이었다.

    어린 동생들은 부모님의 죽음이 그렇게 크게 다가가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부모님의 회사 사람들이 와서 어린 나의 등을 토닥이며 수고했다고 할 때에도 나 혼자라 다행이라 여겼다. 그 다음부터는 제대로 울 수도 없었다. 추락 사고였다고 했다. 가드레일을 뚫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시신을 온전하게 모실 수 없다고 하는 병원 측의 말에 망연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몇 개의 납골당을 골라보다가 바다가 보이는 곳에 가고 싶다고 했던 부모님의 말이 떠올라 바다가 보이는 납골당을 알아봤지만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라 결국 시골의 어느 납골당에 모셔야 했다. 가격도 제일 싼 것으로 쳐야 맞출 수 있어 어머니와 아버지의 납골당의 자리는 한 블록을 더 넘게 떨어져 있어야 했으며, 어머니는 고개를 빠듯하게 올려야만 보이는 자리였고, 아버지는 거의 엎드려야만 보이는 맨 밑 자리였다. 모든 것이 초라했다.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납골당에 도착해서 함을 넣는 동안에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모든 게 돈으로 정리되고 말았다. . 그 돈이 뭐라고 나는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동생 둘은 부모님의 유골함을 넣고 나서야 엉엉 울기 시작했고, 나는 동생들을 품 안 가득 끌어안아야만 했다. 어른이 되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돈을 벌어야 했고, 돈을 벌어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골함을 바닷가로 보이는 더럽게 비싼 납골당에 모셔야만 했다. 그런 목표가 없으면 당장에라도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절벽에서 동생 둘이 떨어졌을 때, 우습게도 벌을 받고 있는 거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동생 둘보다, 먼저 돌아가신 부모님보다 살아남은 내가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좀비들에게 쫓겨 산길을 뛰어 내려오는 동안에 모르는 사이 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친척에게 전화가 오고, 할머니에게도 전화가 왔지만 받을 수 없었다. 제 정신으로 살아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 동생들은? 은은? 진은? 부모님을 따라 갔을 거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동생들의 유골함마저 부모님처럼 높은 곳에 둔 채 제대로 닿지도 않아 손으로 벌벌 떨며 문을 열고, 또 문을 닫는 일은 다신 돌이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 또한 살아야만 했다. 아직 나는 하지 못한 일이 많았다.

    강릉을 가려고 했던 것에는 큰 이유가 덧붙여지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허무하단 생각을 먼저 했다. 바다를 보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살았는데, 고작 이런 상황에서야 오게 됐다는 게 우습기만 했다. 동생들과 같이 왔었어야 했다고 끝없이 반복해도 나는 그 자리에서 동생들을 따라 뛰어내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만큼의 용기가 없던 거였을까, 아니면 그만큼 동생들을 아끼지 못한 거였을까. 바다에 몇 번씩이나 돌멩이를 던지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호수 같은 바다. 해가 지는 하늘은 빨갛고,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세 명이 모여 이야기를 했던 날을 생각했다. 그 날은 진이 태릉에서 돌아와 꽤 무기력하게 있었던 날이었고, 은은 원래 다니던 레슨이 끊겨 졸지에 나 혼자 일을 하던 순간이었다. 동생들이 집에 남아있다는 생각에 배달 알바를 마치고 바로 피자 네 판을 자리에서 샀다. 이런 걸 사오면 잘 먹지도 않는 거라며 타박을 놓을 은이나, 은을 옆에 두고 먼저 박스를 열어 피자를 집어 먹을 진이 먼저 떠올랐다. 이제는 집을 떠올리면 부모님이 기다리고, 어린 동생들이 서있는 것이 아닌 두 명의 동생이 나를 맞이하는 것만 생생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가로등의 전등이 수명을 다한 건지 불이 유난히 불길하게 깜빡였고, 가끔씩 도로로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나왔다. 그때까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괜찮아 질 것만 같았다. 상황에 대한 불안보다는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할 거란 권태와 속이 꽉 막힌 답답함만이 남아있었고 집에 도착해서도 미미한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였다.

    집에 도착하자 순순히 나와 있던 은이 내 손에 있는 피자 박스를 빼앗아 들고 방 안으로 도도 달려갔다. 뒤늦게 방에서 나온 진은 멀뚱히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터벅터벅 다가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진은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수고했어, .”

    나는 그 말에 답을 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굳어 있었고, 방에서 나온 은이 진과 나를 보고 징그럽다는 표정을 지은 채 얼른 들어오라고 소리를 쳤다. 속 안에 가득 매우고 있던 답답함이 완연하게 풀리던 순간이었다. 나의 집은 여기였다. 오로지 셋 만이 존재하는 완전한 집. 그러므로 나는 살아야만 했고, 우리의 일상을 되찾아야만 했다.



    2020.09 허이재 커뮤니티 개인 로그 (INSTANT FRIENDS)

    'Conques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행의 회고록  (0) 2020.08.12
    마지막 첫사랑  (0) 2020.08.12
    2017년 10월 xx일 보낸 메일입니다  (0) 2020.08.12
    수신자 불명  (0) 2020.08.12
    Intro  (0) 2020.08.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