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자 불명



    안녕. 잘 지내? 어우 낯 간지러워. 야, 잘 지내냐? 하여간 연락이 없어. 결국 연락이 없어서 내가 먼저 또 메일 보낸다. 먼저 연락을 하는 법이 없어. 진짜 내가 이렇게 꾸준히 연락 안 했으면 넌 진짜… 아니다, 됐다. 암튼 메일의 결론을 먼저 쓰자면 나는 잘 못 지내는 것 같다. 웃기지만 그렇게 됐네.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넌 암튼 놀라서 소리 지를 거다. 연락 없어도 넌 내 걱정 안 하지? 걱정도 안 되니까 미국에 홀라당 혼자 간 주제에 돌아오지도 않는 거고. 하여간 니 성격머리 봐서는 누가 널 데리고 가겠냐. 이 화상아. 바보, 멍청이, 똥개, 말미잘, 하여튼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짓은 니가 다 하지. 여기 와서도 세상에서 니가 제일 재수 없어. 으유. 넌 진짜 니 동생 죽을 때야 먼저 연락할 거다. 야 너 진짜 죽어? 하고. 이 정 없는 누나야. 심지어 티비에 떡하니 나오거나 엄마한테 연락 와서야 알겠지? 생각하니까 존나 빡치네…….

         

    나 진짜 죽을 뻔 했다고. 과장도 아니고 진짜로. 하… 야, 진짜 어이가 없는 게 뭔 줄 아냐? 내가 너 생각이 나는 거야. 진짜 이게 인생이 망할 징조인가. 어떻게 그렇게 초절정의 위험한 순간에 니 밖에 생각이 안 나냐? 너 이거 보면 너도 데리고 갈 놈 없다고 비웃을 거지? 존나 딱 보여, 하소윤…. 웃지 마라. 재수 없어. 누군 사활을 걸고 나와서야 열심히 편지를 쓰는데 예상되는 반응이 고작 날 비웃는 거뿐이라니…. 내 인생 진짜 헛 살았다, 헛 살았어. 난 진짜 할 말이 존나 많은데…… 다 말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애. 니가 내 말을 어떻게 믿겠냐? 나도 지금 나한테 일어난 일이 안 믿기는데. 그니까 살아서 돌아가면 내가 티비에 나오는 지나 똑바로 봐라. 나 무조건 티비에 나와서 다 까발릴 거다. 니 동생이 너보다 먼저 유명해질 거라고.

         

    아 맞다. 너 근데 진짜 한 번을 경기 보러 안 오냐? 갑자기 겁나 서운함. 나는 어? 니 연주회도 보러 가고, 콩쿠르도 꼬박꼬박 갔는데. 하다못해 미국까지 가서 대회 가는 거 유투브에 차곡차곡 업로드 되는 거 보자마자 하나하나 열심히 봤는데. 내가 이런 걸 누나라고…… 넌 진짜 운 뒤지게 좋은 거야. 어디서 나 같은 동생을 얻냐, 니 팔자에. 착하고 잘생기고 능력도 있고. 거기다가 니 걱정도 해준다고 한 달에 국제통화료도 꼬박꼬박 내고, 얼마나 좋아. 아주 운복을 지 발로 찰 새끼……. 그니까 엄마한테 좀 연락도 해. 엄마가 뭐만 하며 소윤이랑 연락이 안 된다느니, 미국이라 시차가 안 맞는다느니, 나한테 말하느라 바쁘다고. 니 팔자에 나 같은 동생 만들어 준 건 엄마 아빠야, 이 가시나야. 좀 잘해. 이건 뭐 내가 동생이 아니라 오빠다, 오빠. 제발 둘 사이에 날 좀 끼우지 말래? 엄마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왜 나한테 널 찾냐고. 너한테는 안 그러지? 그게 복이다, 가시나야.

         

    하…… 얼굴 까먹겠다. 사진도 보내면 니는 왜 그렇게 쪼끄맣게 찍힌 걸 보내냐? 나는 어? 떡하니 나 찍힌 사진 보내잖냐. 나 잘났어요~ 하는 사진. 너도 그렇게 좀 찍어라. 사진 못 찍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면 뭐, 사진 찍는 것도 귀찮아서 그러냐? 그런 주제에 피아노는 어떻게 연주한대. 귀찮아서. 너 이거 보면 엄마한테 이를 거라고 할 거지? 피아노 어쩌구저쩌구……. 이젠 니 패턴도 다 알아. 다 아니까 좀… 척 지지 말고 돌아와라. 아직도 화났어?

         

    야. 내가 얼마나 익숙해졌으면 미국 시차로 지금 몇 신지 계산이 너보다 빨리 될 걸? 뉴욕은 지금 12 시겠네. 썸머 타임도 안다, 나? 니 동생 상식이 많이 늘었거든. 맨날 공부해라, 멍청아. 니 머리를 쓸모 있는 데다 써봐라. 잔소리 잔소리. 어휴. 나 아직도 공부 빡 집중하면 니 목소리 들려. 그거 아니지! 하는 거. 그거 니 말버릇이잖아. 그거 아니지! 그건 아니지! 야!! 하재윤!! 와 나 이거 녹음해서 보내줄 수도 있음. 완전 너랑 개 똑같음. 나 지금 혼자 해보고 소름 끼쳤잖아. 대박. 나 좀 소질이 있는 듯? 듣고 싶으면 니가 먼저 전화하셈ㅋ

         

    아무튼 결론은… 야 만약 내가 못 돌아가면……. 하 씨발 이거 송믿음이 위험하다고 하지 말랬는데. 아무튼, 내가 못 돌아가면 넌 책임지고 내 편으로 오는 사람들 맞이해줘라. 내가 너 소개 시켜주겠다고 약속도 했단 말야. 그니까 넌 내가 죽으면 어디에 죽은 듯이 숨지도 말고 내 장례식장에 와서 자리 꼭 지켜라. 우리가 말이 연년생이지 그냥 쌍둥이처럼 자랐잖아. 그니까…. 넌 책임져야해. 내가 한 행동은 내가 다 책임질 건데, 나 하나는 그냥 너가 책임 좀 져라. 니가 어쩔 수 없이 몇 개월이 됐건 누나잖아. 철없는 동생 하나 뒀다, 생각 하고. 알겠지?

         

    아 그리고 나 전국체전 10월에 또 나간다. 이번에 성적이 좋으면 바로 국가대표 선발전까지 간대. 너 계속 그렇게 무시하고 몇 번 성의 없게 대답하면 내가 메달 따고 카메라 앞에다가 하소윤 니 석자 말해버리는 수가 있어. 넌 나랑 다르게 쪽팔린 일은 질색할 정도로 싫어하니까. 그니까, 꼬우면 연락해라. 다음 주에도 또 메일 할 거니까, 질린다고 스팸으로 돌리지 말고. 

         

         

    (메일이 발송되지 않음)



    2020.04 하재윤 커뮤니티 개인 로그 (Melt In Oc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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